윤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뒤, 고민 끝에 학교 선배가 살던 오래된 방을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욕실이 없고, 벽지도 오래된 그곳은 누가 보기엔 불편한 집이었지만, 저에게는 한 달 월세가 1만 엔 이상 줄어드는 생존의 기회였습니다. 처음에는 목욕을 매번 센토에서 해야 한다는 점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센토에 가야 하는 날이면, 잠깐이라도 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몸을 움직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따뜻한 물과 분위기는 저에게 매일을 견디게 해주는 작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아르바이트는 필수
일본어 실력이 어느 정도 늘고 나니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즈음 시부야에 있는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관광객도 많고, 말도 많이 써야 하는 환경이라 망설여졌지만,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다행히 합격했습니다. 오코노미야키 가게의 아르바이트 시간은 매일 오후 3시부터 밤 9시까지였습니다. 서빙, 설거지, 가끔은 철판 앞에서 마요네즈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첫 출근 날, 저를 기다리고 있던 일은 화장실 청소였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라는 사장님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답은 했지만, 생전 처음 해보는 화장실 청소에 순간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좁고 지저분한 그곳에서 청소 도구를 들고 바닥을 닦고 있으려니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속상해서, 피곤해서, 낯선 곳에서 홀로 있는 현실이 갑자기 너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외국인 아르바이트가 많지 않았고, 특히 저는 일본인들만 있는 곳을 선호하다 보니, 한국인이라 차별당하는 느낌도 들고 해서, 잠시 화장실 문을 닫고, 소리 죽여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유니폼을 고쳐 입고 나왔습니다. 그날, 제 마음 한 구석도 함께 청소한 기분이었습니다.
센토에서 받은 위로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9시에 퇴근 후 집에 오면 9시 30분쯤 되었는데 센토가 문을 닫기 전, 겨우 시간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급하게 수건과 비누를 챙겨 들고 센토로 향하던 그 길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하지만 때로는 시간에 늦어 목욕탕을 이용하지 못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럴 땐, 오코노미야키 특유의 가츠오부시 향과 마요네즈의 기름지고 짙은 향이 머리카락과 옷에 그대로 배어 있었습니다. 결국 주방 싱크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습니다. 따뜻한 물이 안 나왔으므로, 선배가 두고 간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 비누로 두세 번 머리를 헹구며 대충 냄세만 지우자 했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매일이 작은 전쟁이었습니다. 일찍 일어나 새벽 청소를 하고, 학교에 가고, 오후엔 다시 아르바이트. 그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돈보다도 절실했던 건 인내심과 체력이었습니다. 욕실이 없다는 건 분명 큰 불편이었지만, 그 덕분에 저는 센토의 따뜻함, 시간을 지키는 습관, 몸을 관리하는 절제 같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일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법을 익혔습니다.
마무리하며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참 초라하고 많이 고단했습니다. 철없던 25살의 저는 싱크대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며, 매일매일이 힘에 부치고 버거웠지만 당당히 잘 버틴 오늘에 감사하며, 그 순간 만큼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단단하게 철들어 가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가 감당한 고단함이 조금씩 나를 강하게 만들고 있음을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미용실 갈 돈도 없어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며, 옷과 머리에 밸 정도로 심한 오코노미야키 냄새에 입맛을 잃기도 했었지만, 그런 아르바이트들 덕분에 일본에서의 삶에 녹아들 수 있었다는 감사함도 있습니다. 그때만 가능한 다시없을 그런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