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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본 유학기 23>그리웠던 가족들의 방문, 마무리하며

by beautyearth2025 2025. 7. 20.

일본 유학을 시작한 그 해, 제게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 자체도 벅찼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무겁게 했던 건 한국에서 하나둘씩 일어나는 가족의 크고 작은 행사들이었습니다. 특히 유학 첫 해 셋째 언니의 결혼식을 가지 못했던 일은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예비형부와는 떠나 오기 전에 미리 인사도 나누었지만, 막상 모든 가족이 모여 함께 웃고 축하해 주는 자리에 제가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계속 걸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유학 초기였고,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숨 돌릴 틈도 없었던 시기로 항공료조차 큰 부담이었던 그 시절,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바람은 마음속에만 고이 접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웠던 가족들의 방문

시간이 흘러 전문학교에 진학하면서 상황은 조금 나아졌지만, 하루 일과는 늘 빠듯했습니다. 오전부터 오후 늦게까지 수업을 듣고, 저녁 5시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자정이 되어서야 퇴근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 있었지만, 그 하루도 과제나 빨래 등으로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습니다. 전문학교 1학년때에는 오빠의 결혼식이 있었지만, 여전히 한국에 갈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빠지기 힘든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전문학교 수업은 결석이 많으면 졸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마음은 한국으로 향했지만, 몸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 일로 참석 못한다는 전화를 했을 때, 아버지께서 전화로 하나뿐인 오빠 결혼식을 안 오냐며 몹시 서운해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섭섭함이 섞인 아버지의 한마디 한마디에 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를 설명하려 했지만, 결국 죄송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났지만, 감정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 더욱 서글펐습니다. 그렇게 가족들과 단절된 외로운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제 여름방학에 맞추어 아버지의 환갑기념으로 어머니와 아버지, 둘째 언니와 조카 두 명이 일본으로 방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못 가니 가족들이 저를 보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잠시나마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며칠 동안 설렘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가족들과 함께 보낸 일주일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르바이트는 계속해야 했으므로, 오전부터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까지의 시간들로 일정을 짜서 도쿄의 관광지부터 제가 자주 가던 근처 슈퍼까지 함께 다녔고, 거리 곳곳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본의 깔끔한 거리, 규칙적인 신호, 정중한 점원들의 태도에 가족 모두가 신기해하고 감탄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일본의 전자제품이 인기를 끌던 시기였습니다. 코끼리표 밥솥, 타이거 보온병, 작고 세련된 카세트 플레이어는 꼭 사 가야 할 품목이었는데, 아버지는 키코망 간장을 몇 병이나 사서 무겁게 짐을 꾸렸습니다. 그 짐 속에는 가족의 정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무리하며

하지만, 즐거운 시간이 길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이 떠나던 날, 공항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괜찮은 척 웃었지만, 홀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엄청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있던 시간은 마치 짧은 꿈만 같았고, 꿈에서 깬 뒤의 현실은 더 적막하고 쓸쓸했습니다. 가족들이 돌아간 후 며칠 동안은 밥맛도 없고, 공부에도 집중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있으면 문득문득 가족의 웃음소리가 떠오르고,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괜히 울컥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향수병’이 더 심해졌고, 석양이 지는 저녁 무렵은 가급적 혼자 있지 않으려 했었던 거 같습니다. 외롭다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무렵 뭔가 견디기 힘들다는 감정을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향수병도 점차 따뜻한 기억으로 변해갔습니다. 언니와 오빠의 결혼사진 속에 여전히 저는 없었지만, 힘들었던 만큼, 그리웠던 만큼, 가족이란 존재의 소중함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