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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일본 유학기 18>문고판과 야마노테선, 마무리하며

by beautyearth2025 2025. 7. 14.

90년대 일본 사람들은 전철에서 조용히 앉아 신문이나 책을 읽고 있었고, 심지어 만원 전철에서도 문고판을 펼친 채 침착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일본은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일상화되지 않았고, 지하철 안은 조용한 독서실 같았습니다.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은 저도 전철에서는 자연스럽게 책을 읽곤 했었습니다.

문고판과 야마노테선

그 당시 자주 가던 신주쿠 기노쿠니야 서점에는 다양한 책들이 층마다 가득 진열돼 있었고, 그중에서도 저는 저렴한 문고판을 즐겨 샀었습니다. 크기가 작고 가격도 저렴해, 유학생 신분으로서 큰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책 한 권을 고르고 계산대로 향하며, 마치 일본어와 더 가까워진 듯한 기분에 들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치면, 글줄이 왼쪽에서 오른쪽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세로 쓰기 방식이라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가로 쓰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세로로 내려 읽는 일본의 전통적인 글 구성은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읽다가 문장을 놓치기도 해서,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점점 익숙해졌고, 세로 쓰기 특유의 리듬감과 집중도에 적응해 갔습니다. 수업과 아르바이트로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책을 읽고 싶었던 저는, 종종 야마노테선을 한 바퀴 도는 방법을 선택하곤 했습니다. 야마노테선은 약 1시간이면 한 바퀴 도는 순환선이어서, 특히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 목적지 없이 책을 읽기엔 딱 좋았습니다. 전철에 올라 조용히 창가에 앉아 문고판을 펼치면, 그 1시간은 어느 도서관보다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지나치는 역 이름과 창밖 풍경, 전철 특유의 진동과 책장을 넘기는 손끝 감각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그 시기 저는 작은 일본 전통 이자카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어가 익숙하지 않았기에 처음엔 주방 안쪽에서 설거지만 담당했습니다. 말수가 적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접시를 닦으며 주문을 주고받는 직원들의 대화를 귀로 익히는 것뿐이었습니다. 메뉴 이름, 손님을 대하는 표현, 주방으로의 전달 방식 등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따라 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록 서툰 일본어였지만 손님 앞에 서서 인사하고, 주문을 정확히 듣고 주방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간혹 잘못받은 주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몰랐던 표현들을 배워하며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지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성공이 쌓일 때마다 자신감이 붙었고, 일본어는 책에서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익혀야 하는 언어임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마무리하며

지금도 일본에서는 문고판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드라마나 영화화된 작품은 문고판으로 재출간되며 다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곤 합니다. 디자인 또한 다양화되어, 젊은 층의 수요도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문고판은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문화이자, 일본 출판문화의 대표적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책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유학시절 구입했던 문고판들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가끔 옛 생각에 펼쳐보면 돋보기안경을 써도 안 보이는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에, 참 많이도 읽었고 치열하게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돌이켜보면 낯설었던 단어들과 세로 쓰기, 조용했던 전철 안의 독서 풍경, 작고 얇았지만 가득 찼던 문고판들 그리고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터득한 일본어, 이 모든 것들이 쌓여 어느 순간 일본어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게 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의 수업 이외에, 생활 속 사람들과의 대화와 책을 읽고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가며 익히는 전통적인 방법이, 가장 빠르고 오래 기억되는 언어 학습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제 책장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그 책들을 오늘부터 한 권씩 다시 읽어볼까 하는 고민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