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를 떠나 처음 시작한 윤희와 저의 집은 일본의 전통 아파트 1층 원룸이었습니다. 역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아파트 1층, 큰 도로에서 한 골목 안쪽에 있는 오래된 건물로, 우리들은 그곳이 마치 자취 인생의 시작점처럼 느껴졌습니다.
첫 이사
우리는 이사하는 날 한국에서처럼 같은 라인의 옆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불완전한 일본어로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인데 잘 부탁드린다는 내용의 인사말과 작은 선물을 준비해 초인종을 누르니, 일본에서는 조금 낯선 문화였는지 “아, 이런 인사를 다 하네?” 라며 의외라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아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던 터라, 천 엔 샵에서 밥그릇부터 수저까지 사야만 했고, 하교 후에는 동네를 돌며 버려진 서랍장, 의자 책상 등을 주워와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습한 일본의 기후 탓에 이불을 수시로 말리고 세탁해야 했는데, 큰 이불 등은 집 앞 코인 란도리에서 세탁을 했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빨래방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일본에는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제일 신기했던 점은 단연코 자판기였습니다. 음료나 커피는 물론이고 맥주 등 술 자판기도 있었습니다. 맥주도 용량별로 작은 캔부터 큰 대용량 캔까지... 참 신기했었습니다. 일본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저는 윤희와 이곳에서 즐겁게 오래 함께 살게 될 줄 알았습니다. 이사 후 얼마동안 우리들의 생활은 등하교나 장보기 등으로 항상 같은 패턴의 생활이었습니다. 함께 유학온 윤희는 맏딸이었는데 집안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나온 저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일본 도착 후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든 것을 윤희와 같이 했지만, 제가 새벽청소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혼자 하는 시간들이 생겨났습니다. 경제적으로 빠듯했던 저는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사무실 청소 아르바이트를 다녔고, 일이 끝나면 그곳에서 바로 등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이자카야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벽청소와 저녁 아르바이트 그리고 그 사이의 학교 수업, 머릿속은 늘 일본어로 가득했지만, 그게 늘 이해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수면부족으로 정신은 흐릿하고, 이자카야의 손님 주문은 빠르고 어려웠으며, 피로는 점점 쌓여만 갔습니다.
갑작스러운 귀국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윤희가 갑작스럽게 유학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정했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이라는 말에 더 물을 수도, 잡을 수도 없었지만, 갑자기 혼자 남겨진 저는 한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윤희의 짐들만 빠진 방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고, 같이 웃고 고민 나누던 사람이 사라지자 좁던 방이 더 넓고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 작은 원룸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했습니다. 월세, 생활비, 학비 매일매일이 치열한 싸움이었고, 아르바이트 시급을 더 받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넣어야 했습니다. 피로는 쌓여갔고, 식사는 삼각김밥과 우롱차등으로 점점 간단해졌으며, 수면 부족으로 살은 어느새 10kg 넘게 빠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살 빠져 이뻐졌다고 했지만, 그건 자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희생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해 질 녘만 되면 우울해지고 눈물이 나는 향수병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무리하며
그 원룸 1층 방에서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알바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외로움은 깊어졌고, 유학이란 단어가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며,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에서 저는 어떤 어려움도 버텨낼 수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으며, 혼자라는 사실이 두렵기만 했던 그 시간을 견디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사람은 스스로를 일으키며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외로움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오히려 단단하게 다져주었는데, 어쩌면 진짜 유학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