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봄, 제가 다녔던 일본어 학교는 라보일본어교육연구소였습니다. 신주쿠 니시구치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위치에 있었던 라보일본어학교에서의 첫 수업은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일본어는 거의 모르던 상태였지만, 선생님은 단 한 마디의 한국어나 영어 없이 전면 일본어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그 방식이 일본어에 몰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수업은 하루 4교시
당시 수업은 하루 4교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진행됐습니다. 매 수업은 철저하게 반복, 실전, 응용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첫 시간에는 상황별 새로운 문형을 배우고, 두 번째 시간에는 교실 내에서 짝을 지어 회화를 연습합니다. 세 번째 시간에는 주어진 상황에 맞는 문장을 조합해 발표를 하고, 마지막 시간에는 짧은 독해나 작문을 통해 정리를 합니다. 이런 방식은 저처럼 말 한마디 못 하던 학생에게도 말문이 트이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라보일본어학교의 또 다른 특징은 자체 제작한 교재, 테키스토(テキスト)였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테키스토는 A4사이즈의 크고 두꺼운 책이었습니다. 당시 시중의 일본어 교재는 문법 중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라보의 테키스트는 훨씬 실용적이고 ‘생활 속 회화’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 교재에서 배운 표현은 기숙사 근처 마트에서, 전철 안에서, 학교 행정실에서도 그대로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초급반이었었기에 아무리 버벅대고 대답을 못해도, 선생님들은 실수를 절대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잘못 말하면, 그걸 유머로 바꾸며 분위기를 풀어주셨죠. “지금은 틀려도 괜찮아. 여기선 틀리라고 있는 거니까.” 그 말에 위안을 얻었고, 말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업 외에도 주 1회 발표 수업이나 1박 2일 일본가정 홈스테이 체험 등도 있었습니다. 홈스테이를 하면서 그 댁의 어린 자녀와 대화를 하는데, 'ある'와 'いる'를 틀리게 써서 웃음을 사기도 했었네요. 그때는 일본어 잘하는 그 일본 아이가 무척이나 부러웠었습니다.
유학 첫 6개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유학 첫 6개월 동안은 아르바이트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말이 안 되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오로지 일본어를 배우는 데 집중한 시기였습니다. 처음 6개월 학비는 완납한 상태였으므로 경비를 아껴가며 일본어 공부에만 집중했었습니다. 유학 초기에는 생활비도 걱정이고, 주변 친구들은 하나둘씩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본어 실력이 형편없었기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 공부만 하기로 결심했었어요. 한국인이 하는 식당은 할 수도 있었지만, 저는 일본인이 하는 곳에서만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거든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한국분들과 일을 하면 편하긴 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일본어가 빨리 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유학 4년 동안 일본분들 가게에서만 알바를 했었고, 그 덕분에 빨리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마무리하며
당시 제 하루는 단순하지만 빽빽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일본어학교 수업, 귀가 후엔 기숙사 도서관에서 자습, 저녁엔 테키스트 복습과 회화 연습. 이런 생활을 6개월 동안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니 어느새 말이 자연스러워지고 듣기 실력도 늘어있었습니다. 말이 완벽하지 않았던 저는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알바를 찾다가, 대기업 사무실 새벽 청소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6개월이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였는데,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간다역에서 가까운 빌딩이었는데, 첫차로 출근하고 1시간 30 정도 청소를 했었습니다. 처음엔 긴장됐지만, 어느 정도 기본 회화는 되는 상태였기에, 동료 할머니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일이 끝나면 같이 일하던 할머니께서 카페에서 모닝세트도 사주시곤 했었습니다. 아마도 타국에서 공부하는 어린애가 안쓰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사랑받으며 재밌게 일했던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전까지 쌓아온 언어 자신감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마 처음부터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면 얻지 못했을 자신감이었습니다. 물론 유학 생활에는 경제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아르바이트는 오히려 자신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일본 유학을 시작할 때 “언어는 단기간에 마스터되지 않는다. 버텨내며 익혀라”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대로, 첫 6개월을 일본어에 집중한 것은 제 유학 생활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 일본 유학을 준비하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조금이나마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