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3월, 저는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일본어로 나오는 방송 자막조차 한 글자도 알아듣지 못했던 저는, 제 키만 한 덜덜거리는 3단 이민가방을 끌고 저녁 무렵에서야 겨우 기숙사에 도착했습니다.기숙사는 학교와 전철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으며, 주변으로 아라카와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기숙사의 허름한 다다미 방에는 2층 침대가 있었고, 공용 독서실과 공용 주방, 공용 화장실이 있었습니다.“이게 내 방이구나.” 방문을 닫고 앉은 순간,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낯선 타국에서 말은 안 통하고, TV 속 일본어는 빠르고 낯설어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기숙사에는 미리 도착한 다른 어학원의 한국 친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하지만 그들은 미리 일본어를 공부하고 온 친구들로, 저처럼 용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학교 가는 길
드디어 학교 가는 날 아침, 구글지도는커녕 휴대폰도 없던 그 시절, 작은 손 지도 하나 들고 학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동생 윤희와 미리 학교 가는 연습을 하긴 했어도, 막상 당일 아침이 되니 출근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지금은 일본 어딜 가나 한국어가 표기되어 있어 길 찾기가 수월해졌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철을 갈아타는 법도 몰라 개찰구 앞에서 당황했고, 목적지 역 이름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며 길을 찾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학교에 도착해 첫 수업에 앉았는데, 교실은 여러 나라에서 온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어만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수업시간에 자국어 사용은 금지였습니다. 일본어 학교에는 초급, 중급, 고급으로 클래스마다 등급이 정해져 있는데, 저와 윤희는 초급반부터 시작했습니다. 제 클래스에는 5~6명 정도 있었는데 중국, 태국,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의 첫 선생님은 하기와라선생님이었는데 미혼의 여성분이었습니다. 매우 친절하고, 예쁜 선생님으로 인기가 많았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일본어 학교는 오전 9시부터 1시까지 수업이었는데, 수업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가거나 남아서 부족한 공부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수업은 거의 다 놓쳤습니다. 칠판에 적힌 문장도,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말도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죠. 하교 후 저녁을 해결하려고 동네 마트에 갔었을 때도, 무엇이 밥이고, 무엇이 반찬인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おにぎり(오니기리)’도 몰랐기에, 삼각김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라벨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가장 익숙해 보이는 빵과 우유를 들고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마트에서 장 보는 것조차 모험이자 도전이었습니다.
생존형 일본어
일본어 공부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가나는 금방 익혔지만, 칸지는 암호 같았고, 문장의 어순과 조사는 자꾸 헷갈렸습니다.
특히 ‘は’와 ‘が’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몇 주가 걸렸고, 그걸 선생님이 일본어로 설명하니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처음 6개월은 정말 미친 듯이, 죽기 살기로 공부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말이 안 되니 아르바이트도 어려웠고, 일단 진도 따라가기가 벅찼었기에 기숙사에서도 제일 늦게까지 공부하고는 했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전철에서 여고생들의 떠드는 소리가 그저 소음으로 들리다가, 일본생활 6개월 즈음부터 그 소음들이 단어가 되어 귀에 들리기 시작했었습니다. 현지에서 생존으로 매일 듣고 말하고 쓰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고, 처음 들리지 않던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언어는 외워서가 아니라 ‘버텨서’ 되는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유학은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트에서 우유 고르는 법을 배우고, 기숙사 복도에서 외국인 친구와 인사하는 법을 익히는 것.그 사소한 모든 순간이 ‘유학’이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모든 게 새로웠던 그때의 저를 지금도 응원하고 싶습니다.다음 글에서는 일본어학교 수업 방식과 공부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눠보겠습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